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 베스파시아누스는 세금 징수원이었던 에퀴테스 계급의 아버지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사비니 리에티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문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했고, 가이우스(칼리굴라) 아래에서 추천을 받아 AD 39년 30세의 나이에 40년도 법무관을 지냈다. 하지만 법무관 임기가 끝난 직후, 그를 추천한 칼리굴라가 암살됐고 클라우디우스가 뒤를 이었다. 이 시기 암살정국에서 그는 공화정 복구를 놓고 토론 중인 원로원에게 암살된 칼리굴라의 정식장례와 암살범 처벌을 주장했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 장악 후 공화정 복귀를 무산시켰고, 이 사건 이후 황실 내 해방노예 나르키수스, 카이니스의 추천을 받아 친황제파로 계속 승승장구했다. 그래서 그는 법무관 임기 종료 후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시절인 AD 43년 브리타니아에서 20개가 넘는 도시를 점령하는 뛰어난 전공을 세우면서 개선식을 치르고 그 공으로 BC 51년에는 집정관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급사했고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는 그 틈을 노려 유언장을 무시하고 네로를 단독즉위로 옹립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한동안 아무런 직책을 얻지 못했지만 AD 63년 경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임명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AD 66년 유대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토벌해야 하는 시리아의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갑자기 병사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의 임무를 맡아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